함양사람들2017.05.24 13:42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우리 시대의 어머니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자식들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후 집안의 생계는 물론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어머니. 어느새 세월이 흘러 곱던 얼굴은 주름이 가득하지만, 사회적 성공과 일가를 이룬 두 아들이 있어 언제나 당당하다. 제45회 어버이날을 맞아 장한어버이 부문에 선정된 안의면 강점옥(68) 여사. “내가 살기 위해 그렇게 했다. 어느 부모가 그러지 않겠나” 부모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한 듯 이야기하지만 아낌없이 내어준 그녀의 삶은 모두의 귀감으로 다가온다.

결혼 생활 15년차에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중학교 1학년과 초등 5학년 두 아들을 책임져야 했다. 가진 것이 적었던 그녀는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때부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어머니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학비와 생계비를 위해 논도 팔고 집도 팔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런 말이 속상해 더욱 악착같이 살았던 것 같아요” 정말 악착같은 모정이었다. 진주지역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이사를 택했다. 그리고 서울대에 입학한 아들을 위해 서울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농사 조금 지어봐야 나오는 돈이 적어요. 매달 돈이 나올 수 있어야 학비를 낼 수 있었어요. 옷 만드는 공장도 다니고 아기 돌보미도 하고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렇게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진주에서의 5년, 서울에서의 3년, 모두 8년이라는 자녀들에 올인하는 삶이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형편이 어려워 영세민 수급을 받았었는데, 이게 학교로 바로 통보가 갔나봐요. 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아들이 너무 낙심하는 것을 보고 다음해에는 신청하지 않았죠. 아들 기 죽이면 안 되잖아요” 자신은 부족해도 언제나 아들들만은 당당하길 원하던 어머니.


어머니가 그렇게 자랑하는 두 아들 한지훈·지용 형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맏이 지훈씨, 그리고 서울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현재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둘째 지용씨. 수상이 확정된 후 ‘잘 커줘서 고맙다. 덕분에 상 받게 됐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니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라는 답장을 받았다며 기뻐하시는 어머니. 아직도 그녀는 아들이 받아온 상장과 일기장을 보물 1호로 간직하고 있다. “일기장에 ‘엄마는 끄세요. 저희는 밀께요’라고 적혀 있었어요. 너무 착한 아이들이지 않은가” 장성한 두 아들의 사회적 성공도 고맙지만 그녀에게는 착하고 바르게 커 준 것이 가장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그 동안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그녀가 이제 1000여 마리의 닭들과 함께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일을 찾기 위해 함양군자활센터에 참여해 친환경 유정란을 생산하는 ‘당내미골 사람들’을 창업했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열심히 살았지만 이런 길을 열어준 곳이 자활이기 때문이죠.”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빌렸던 돈도 이곳에서 일하며 모두 갚았다. “마지막 빚을 갚는 날 너무나 기뻤어요. 아들들에게는 빚을 물려줄 수는 없잖아요.” 7년 전부터 시작한 당내미골 사람들은 이제 닭 1000마리가 넘는 농장으로 변했다. “말년에 나에게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요. 편하면 뭐해요 일거리 있는게 너무 행복해요.”

그녀는 이제껏 제대로 된 자신의 것 하나 살줄도 몰랐다. 장성한 아들이 이제는 엄마를 위해 쓰시라고 말하지만 돈 쓸 줄을 모른다. 언제나 가장 우선이 자식들의 것이었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자랑스럽게 커 준 것이다. “부모의 삶 자체가 교육인 것 같아요. 아이들도 부모를 보고 그대로 심성이 만들어져요. 힘들어도 꿋꿋하게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는 것 아니겠어요.” 아직도 그녀의 바람은 한가지다. “항상 아프지 말고, 바르게 살아간다면 좋은 세상이 온다”라고.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장성해 일가를 이뤘지만 부모에게 자녀는 항상 돌봄의 존재이며 자랑거리다.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5.24 13:39

60년 함양시장 싸전 골목 지킴이

 

지리산함양시장 싸전 골목의 터줏대감 이길순(85) 할머니.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부터 시작된 시장생활이 60여년이 지나 이제는 팔순을 훌쩍 넘어섰다. 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함양쌀상회. 5월2일 장날에 맞춰 이길순 할머니를 찾았다.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23살 때 그해 10월12일 함양장날에 처음 장사를 시작했지” 그렇게 할머니는 굴곡 많은 60여년 시장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어.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뭐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장사를 시작했지” 60여 년 전 함양중앙시장은 지금의 자리가 아닌 경찰서 인근으로 형성됐었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 콩과 보리를 여러 자루 사서 진주 사람한테 넘겼는데 이게 팔고 나니 남는 게 없는 거야. 첫 장사인지 알고 돈을 내먹은(떼먹은) 거지.” 한마디로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이후에는 혼자 여러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하면 돈을 번다고 해서 보따리 장사도 하고 그릇장사도 하고 안 해본 장사가 없어.” 버스를 탈 돈이 없어 걸어서 백전으로 안의로 5일장을 다녔다. “고생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 정성스럽게 만든 떡을 함티(상자를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에 이고 안의장도 가고, 인월장까지 다녔다. “예쁘다는 소리도, 젊다고 집적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욕도 참 많이 먹었어” 새벽에 일어나 도구통(절구통)에 찌어 떡을 만들어 시장에 팔러 나갔다. “새벽에 호롱불 켜서 식구들 먹으라고 밥 해놓고 갓난아이 들쳐 엎고 장에까지 갔지” 어려웠던 시절, 차비가 있으면 버스라도 타지만 그것도 아까워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인월장까지 40리, 안의장은 30리, 생초장이 20리, 백전장도 20리, 수동장은 15리, 할머니가 떡 함티를 이고 갓난쟁이를 엎고 걸어 다닌 곳으로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장사를 해도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야. 지금은 그때 생각하면 부자지 부자” 지금도 어렵지만 그 당시 힘들었던 기억에 눈물까지 흘리신다.

이야기 중간에도 연신 “나는 까막눈이야. 배운 사람이면 차근차근 이야기할건데 아무 얘기나 해도 되나”라며 쑥스러워 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성당에 있는 학교도 다니고 살던 곳 대실에 있는 학교도 다녔지만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단다. “장사 머리에 맞게 공부를 했으면 뭐가 돼도 됐을 거야” 할머니는 장사를 하면서 ‘방정스럽다’ ‘똑똑하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장사는 예년만큼 되지 않는다. “장사가 너무 안 돼. 지금은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하고 나면 딱이야” 그래도 몸이 많이 좋지 않은 이상은 매일 가게 문을 연다. 어쩌다 힘에 부치면 가게 문을 열지 못한다. “이때까지 장바닥 물 먹고 살았으니 장사 안 된다는 말도 못해, 너머(남의) 돈으로 살았잖아”

콩 종자를 사러 온 오랜 단골이 들렀다. “잠시만 있어”라며 뒤쪽 창고에서 굵고 좋은 햇콩을 들고 나온다. “이게 지곡에서 가져온 건데 아주 좋아”라며 건넨다. 할머니는 농가에서 농사지은 것을 가져오면 이것을 사서 판매한다. “이거는 지곡, 이거는 수동에서 가져온 거야. 내가 종자 줘서 잘못됐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 들어봤어” 자랑스럽게 말한다.

젊었을 때는 ‘쌩쌩’ 빠르게 움직였다는 할머니. 이제는 허리가 제법 많이 굽었다. “허리만 꼿꼿하면 좀 많이 다닐 건데 23살 때부터 무거운 것 들고, 이고 했더니 허리가 펴지질 않아” 세월이 흐른 만큼 할머니의 허리도 함께 구부러졌다. 20kg자리 쌀 포대를 들고 날랐으니 오죽 했겠나. “쌀만 팔아봐야 뭐가 남아. 40kg 쌀 한 포대 팔아봐야 5000원 벌기 힘들어 쌀이 이문이 제일 적어”
지금은 시장 인근에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는 할머니. 60여년 시장에서 생활하며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줬다. “부끄러울 것이 뭐 있어.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내 앞가림하고 살고 있는데” 힘에 부칠 때까지 지리산 함양시장을 지켜 나가겠다는 이길순 할머니의 힘찬 다짐으로 이날의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5.24 13:36

건강한 차와 먹거리 함양에 살어리랏다

 

바쁜 일정에도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해 준 ‘자연 그리고 우리(자우리)’ 박영현(55) 대표. 도라지와 비트 등 5가지 재료를 우려낸 빨간 고운 빛의 오근차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그녀의 삶을 쫓는 이야기는 어둑하니 해질녘까지 진행됐다.

지난 2015년 1월29일 이날은 그녀가 함양군 유림면 손곡마을로 주소를 옮긴 역사적인 날이다. 이곳은 어릴 적 할아버지집이 있던 곳이고 현재는 아버지와 그녀

 

가 대를 이어 살아가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에 자주 놀러 왔어요. 그 때부터 함양에서 살겠다는 꿈을 꿨지요.” 어릴 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함양 귀로는 50이 넘어서야 이뤄졌다. “함양 자연이 너무 좋아요.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부산의 회계법인에서 30년 넘게 일한 그녀는 30대 중반부터 시골생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무작정 귀농할 수 없어 도자기 만드는 것을 배웠다. 도자기는 그녀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 중 하나였다. 그녀의 집 곳곳에는 아기자기 예쁜 도자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효소발효와 관련해 배우기 시작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옮았다. “효소는 너무나 매력이 있었어요. 바른 먹거리. 제대로 만들어 제대로 먹는 것이야 말로 건강할 수 있는 길이예요” 강사과정까지 마친 그녀는 여러 곳에 강의도 다니고 여전히 효소에 대한 연구도 진행한다. “발효를 먹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라는 말로 발효음식에 관한 애정을 보였다. 그녀는 또 6년 전부터 녹차 등 전통차에 빠졌다. 배우길 4년째 사범으로 나가보라는 제의도 받을 정도로 열심이다. “취미로 하기에는 준비할 것도 많아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대용차(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를 제외한 모든 차)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 그녀의 취미가 이제는 직업이 됐다.

차도 일반적인 것과 달리 발효를 시킨다. 법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좀 더 흡수가 잘 될 수 있도록 그녀만의 방법으로 발효를 시킨다. 그녀가 만드는 차의 재료는 모두 유기농이다. 꽃에서부터 열매, 뿌리까지. 비쌀 수밖에 없다. 그녀는 유기농으로 키운 재료를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빈다. 물론 많은 부분을 직접 길러 사용하지만. 직접 재배 환경을 보고 그녀의 기준에 찰 경우에만 거래를 한다. “먹는 것이잖아요 제가 마시는 차를 고객이 마신다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유기농이어야 합니다.” 그녀의 마음에 차는 유기농 차를 만들기 위해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또 그 곳에서 씨를 직접 가져와 재배도 한다.

가끔 식품박람회에 가면 너무 예쁜 그녀의 차의 빛에 인위적인 것이 들어가지 않았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녀는 예쁜 빛깔의 꽃차도 좋지만 구증구포(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볕에 말림) 방식 뿌리채소 차도 만든다. 또 여러 가지 재료를 배합해 재료의 성질에 맞는 차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특히 그녀는 일반적인 것과 달리 발효시킨다. 단순 가공 법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에 좀 더 흡수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4월에 상표등록이 되어 이제야 차를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개개인의 체질에 맞는 맞춤식 차를 만들어 낸다. 꽃마다 제다 방법이 다르다,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오는 방법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이 비슷하게 따라는 할 수 있지만 저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노하우가 들어가는 차는 특별해요”

지금은 차를 만드는 일을 많이 하지만 그녀가 가장 애착이 깊은 것은 ‘발효양념’이다. 발효양념을 통해 모두가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발효양념 이후에는 그녀의 집 근처에 체험농장을 만들어 생산에서부터 발효까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족들이 하루 종일 건강한 발효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꿈이다.

항상 배움에 목마른 그녀는 귀농 결심 이후 획득한 자격증만 해도 한 아름이다. 정직한 먹거리,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항상 뛰어다니는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 “제대로 된 먹거리를 제대로 알고 먹어야 합니다. 조금이나마 건강을 예방하는 길입니다.”

참고로 박영현 대표는 함양 블로그를 사랑하는 모임 줄여서 블사모의 회장으로 오는 8월12일 전국 블사모 회원들이 모이는 팜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5.24 13:31

5월20일 발대식, 50여명 참여

 

주간함양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군민들의 상림 사랑을 이어가기 위한 ‘상림사랑 캠페인’을 진행한다.

함양군민들이 상림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보존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상림사랑 캠페인의 그 첫 번째 단계로 지난 5월20일 상림공원 내 다볕당 일원에서 상림지킴이 발대식을 가졌다.


 

이날 발대식에는 함양 군민 등 50여명이 참여해 상림을 이해하고 숲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상림지킴이는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상림을 보호하기 위한 상림 정화활동은 물론 다양한 숲 체험을 통해 상림의 가치를 인식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발대식 이후 이날 캠페인에 참여한 상림지킴이들은 상림 주변을 산책하며 곳곳에 버려진 작은 쓰레기를 줍는 환경정화활동을 펼쳤다. 30여분 동안 환경정화활동을 통해 제법 많은 쓰레기들을 수거했다.
이어서 강영란 숲 해설가와 함께 상림 숲과 상림에 살아가는 생물들을 살펴보는 다양한 체험과 놀이가 진행됐다. 이날은 상림 숲 내 가장 작은 생물인 애벌레에 대해 관찰했다.

 

또한 애벌레의 생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체험도 병행됐다.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애벌레처럼 움직여 보기도 하고, 애벌레의 시각으로 사물을 살펴보기도 하는 등 참여한 학생들의 호기심을 일깨우는 체험 마당이 만들어졌다.


 

이어 천연재료인 찰흙을 이용해 이날 배운 애벌레를 직접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기자기한 애벌레들이 어린 아이들의 손에서 탄생했으며, 만들어진 애벌레들은 자연 속에 그대로 놓아 두고 이날 캠페인을 마무리했다.

주간함양에서 추진하는 상림사랑 캠페인은 매월 행사를 가질 예정이며 참여하고 싶은 학생이나 가족, 군민들은 주간함양(전화 963-4211)으로 문의하면 된다. 참여하는 학생의 경우 1365 자원봉사 마일리

지 적립 혜택도 주어진다.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26 10:01

꽃 같은 아름다운 마음, 한 폭 압화에 담아내다

꽃잎 하나하나가 나무가 되고 계곡이 되고 하나의 작품이 된다. 자연의 선물 압화(押花)는 야생의 풀꽃을 재료로 만들어내는 또 다른 자연 작품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압화작가 이정숙씨. 함양에 터를 잡은 지 4년, 그녀는 여전히 함양의 자연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며 아름다운 꽃 속에 묻혀 살아간다.


 

“함양의 자연, 그 속에서 나는 꽃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운 색깔을 뽐냅니다. 그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함양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입니다” 우연하게 들른 함양의 자연에 반해 함양 사람이 된 그녀. 그녀는 함양 곳곳을 다니며 자연의 선물을 마음껏 즐긴다.

그녀와 함양과의 첫 인연은 4년 전이다. 우연하게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곡 개평마을을 찾은 그녀는 함양의 자연에 반하고 말았다. “농촌관련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을을 찾았어요. 처음 온 곳인데 마을이 너무나 좋았어요. 마침 제가 좋아하는 야생화도 마을 중간 중간 심겨져 있어 ‘견물생심’으로 마을의 꽃들을 가져가 말려보니 어느 지역보다 우수한 색을 났어요.” 그녀는 그때 그 일을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압화의 생명인 아주 좋은 식물 재료들을 함양에서 발견한 것이다.

“남편에게 3년만 살다올게. 뭔가를 만들어 볼 수 있겠다라고 설득하고 함양으로 왔지요” 그렇게 가족들과 떨어져 함양에서의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그녀는 일두고택 인근에 작업실 ‘꽃담’을 만들어 압화를 알리기 시작한다. 물론 그녀가 함양에 정착하기까지 도을주 전 이장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의 도움도 있었다. 함양에 터를 잡은 지 1년 만에 그녀는 압화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지난 1년 동안 함양지역 식물을 모아 만든 작품을 냈어요.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상을 받아 너무 기뻤어요. 함양의 식물을 인정받은 것이어서 더 기뻤어요.” 이후에도 수많은 대회에 출품해 독식하다시피 상을 받았다. 물론 함양의 이정숙 작가로 출품한 것으로 함양을 홍보하는 함양알림이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압화는 영국 귀족사회 귀부인들이 하던 취미 활동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조선시대 문풍지 사이에 꽃이나 나뭇잎을 끼워 넣었던 것도 압화의 일종이다. 압화가 발전하고 산업화 한 곳은 일본이지만 지금의 압화 수준은 우리나라가 최고다. 그녀는 압화작가가 되기 전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10여년 아동들만을 가르치다보니 너무 기교만 가르치는 것 같았어요. 이것은 아니다. 식물로 그리는 것이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압화가 있었어요.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다니다 스승님을 만나 압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개인 작업뿐만 아니라 함양에 압화라는 공예를 알리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회복지관 프로그램에 2년간 참여해 많은 군민들에게 압화를 소개하고 취미를 넘어 압화 작가로 만들었다. 또 초등학교의 방과후 수업은 물론 장애아동 등 많은 아이들에게도 압화를 지도했다. “압화의 재료는 자연에서 얻은 식물이지요. 그래서 조금은 비싸기도 하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압화를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그녀의 활동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부 마을 주민과의 마찰도 시기하는 이로 인해 마음고생도 겪었다.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많이 울었던 적도 있어요. 너무 많은 좋지 않은 소문들이 돌았었지요. 돈을 벌려고 온 것도 아니고, 함양의 자연이, 개평마을의 환경이 너무 좋아 온 건데...” 낙천적 성격의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작업에 몰두해 올해 출품한 작품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오는 5월4일 오후 1시30분 ‘KBS1 문화산책’에 출연한다. 그녀가 들꽃을 채취하는 과정부터 정성스럽게 압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개평마을과 함양을 배경으로 선보이게 된다.  

“오로지 꽃만 보고 살아왔어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대우 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꽃과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녀 이정숙 작가. 함양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얻어진 값진 보물들을 더욱 멋진 작품으로 승화시키길 기대한다.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18 11:18

가슴 뛰는 삶을 사는 지안재 바리스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는 함양 지안재. 그 정상 포토존 옆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푸드트럭이 지나는 길손들을 반긴다. 굽이굽이 이어진 지안재를 바라보며 카페를 운영하는 공경완씨. 얼핏 커피를 만드는 그에게는 전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지만 그는 경추손상장애인이다. 경추손상장애는 목뼈 아래로는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다. “처음에는 모두 미쳤다고 했어요. 저도 사실 자신은 없었으니까요” 오전 11시께 푸드트럭을 직접 운전해 지안재 정상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혼자서 가게 문을 연다. 푸드트럭은 최대한 그가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 트럭을 만드는데 1년이 걸렸어요. 직접 운전할 수 있게, 또 직접 커피 등을 만들 수 있게요” 


 

그는 2014년 9월부터 현재의 지안재 정상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서 커피를 판다. 매일 나와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그와 같은 장애를 가진 이가. 휴천면 금반이 고향인 그는 사고로 인해 목 아래 부분의 감각을 모두 잃었다. “25년 전 그러니까 21살 때 잠깐 군대 가기 전 아르바이트로 운전을 하다 큰 사고가 났어요. 재활 등을 통해 현재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상황이지만 손가락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팔의 기능도 40% 밖에 할 수 없어요.” 그가 가장 힘든 부분은 한 겨울과 한 여름이다. 신경이 손상된 목 아래쪽으로는 체온 조절이 되지 않는다. 한겨울 몇 시간씩 장사를 하다 보면 몸이 꽁꽁 얼어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다.

처음 푸드트럭을 준비할 때는 전국적으로 장애인이 운영하는 곳이 있을 줄 알고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 곳도 장애인이 운영하는 곳은 없었다. “휠체어 타고 이런 장사하는 미친 사람은 저 밖에 없을 겁니다. 구경도 많이 옵니다. 저게 가능한가 하고.” 푸드트럭을 만드는데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직접 운전할 수 있게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운전석, 그리고 트럭에 오를 수 있는 리프트, 커피머신과 여러 가지 용품들까지 직접 그의 손을 거쳤고 그의 아이디어가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라도 장사를 하는 것이 어딥니까” 그는 장애인 휠체어 럭비 선수로 뛰기도 하는 등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의 푸드트럭에는 음료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팔찌와 머리핀 등 예쁜 액세서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아내가 직접 만든 겁니다. 처형이 전주에서 공예 쪽 명인으로 집사람이 배워와 직접 만들고 있습니다” 액세서리는 정해진 금액이 없다. 기분 좋으면 싸게 주고, 특히 비싸다고 말하면 안 팔기도 한다고.

]지안재는 한겨울을 빼면 나머지 계절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손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루를 그렇게 보낸다. “의아해 하는 경우는 있지만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 같아요. 몸은 불편하지만 머리는 살아있으니까요.”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땐 상당히 쑥스러웠다. 이제는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지안재와 오도재에 대한 역사도 전해주고, 함양의 관광지도 알려주는 등 문화관광 전도사 역할도 한다.


 

그는 손님이 없을 때는 구불구불 지안재를 내려다보며 사색에 잠긴다.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조만간 드론을 사 지안재를 넘어 오도재 정상까지 날려보고 싶단다. “그렇게 힘든 부분은 없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한 일리라면 원망이라도 하지만 제가 선택한 일이잖아요” 그가 만든 커피는 맛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손님들이 선호하는 커피를 만들었다. 원두도 많이 주문하지 않고 그때그때 주문해서 신선도를 유지한다. 날이 좀 더 풀리면 츄러스와 커핑빵도 함께 팔 계획이라고. 아내와 3살 아이 등 3가족의 가장인 그.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까 마음이 편하단다. 

“인지도를 높이려면 꾸준하게 자리를 지켜야 해요. 손님들이 지안재를 왔을 때 그 자리에 커피 파는 사람이 있다. 그분들과의 약속이잖아요” 20대 초반 사고로 장애를 입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의 삶에 대한 감동과 경의가 느껴지며, 스스로 힐링이 되는 소중한 만남이었다.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18 10:59

함양군은 타 지역에 비해 노래교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11개 읍면에서 실시하고 있는 노래교실에는 수많은 어르신들이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노래교실이 열리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함양군에서 노래교실은 이제는 하나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이 잘 운영되고 있는 노래교실을 찾아가 무엇이 노래교실을 찾게 만드는지 살펴봤다.



서하면 노래교실
노래와 단합, 두마리 토끼를 잡는 서하면 노래교실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하는 오후7시 서하면 다목적센터에도 불이 켜졌다. 서하면 노래교실은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하지만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30분이나 일찍 나오신 어머니들이 있었다. 다른 읍면 노래교실과는 달리 저녁시간에 진행된 노래교실이기에 수강생이 적지 않을까 생각했었기에 4~5명의 어머니만 계신 것을 보고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오정은회장은 “평소에는 좀 더 오는데, 농번기라 많이들 바쁘셔서 오늘은 좀 덜 오신 편이다.”고 하자 다른 어머니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사람 많을 때 오지 왜 하필 이럴 때 왔어”라는 푸념 아님 푸념을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많은 분들이 참석하기 어려워 보였던 노래교실에 한 분, 두 분 이렇게 오시더니 이내 20여 명의 수강생들이 찾아와 노래교실을 채웠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니 그것이 조금은 어색한지 어머니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서하면 노래교실의 강사, 임명희 강사가 등장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 꼬리가 귀까지 올라가셨다.

“밥은 드시고 나왔어?”라는 임명희 강사의 단순한 인사에도 다들 뭐가 그리 좋으신지 웃으며 오늘 먹은 저녁식사를 말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사인데도 마치 좀 전에 만난 사람처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단순한 강사와 수강생 사이보다 훨씬 훈훈해 보였다.


 

이후 본격적인 노래교실이 시작되었다. 수강생들은 저마다 모두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수강생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애창곡을 한 곡조씩 뽑아냈다. 가만히 서서 부르는 어머니가 계신가 하면, 흥겨움에 춤까지 추시는 어머니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어머니들의 독주를 보며, 노래교실이라는 것이 노래를 배우기 위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노래를 못 부르시는 분들도 몇 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다들 수준급의 노래실력을 뽐내니 여기가 노래교실인지 전국노래자랑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몇 분이 나와서 노래를 하니 슬슬 흥에 시동이 걸렸는지 아예 몇 분은 뒤에 일어서서 춤까지 추신다. 그럼에도 넘치는 흥과 끼가 주체가 안 되는지 아예 앞으로 나와서 춤을 추시니 다른 어머니들과 아버님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평소보다는 좀 적은 출석률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시는 그들의 웃음소리와 활기로 교실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만약 더 많은 분들이 계셨으면 얼마나 활기찰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애매해 다른 곳 보다는 사람 수는 좀 적어 보였지만 수강생들의 에너지가 흘러 넘쳐 교실을 가득 채워 사람 수가 적다는 것도 잊게 만들었다.


 

이어서 임명희 강사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박수를 유도하자 이내 노래교실은 마치 콘서트에 온 것과 같이 어머니들의 호응으로 가득 찼다. 어깨춤을 추시는 어머니부터 흥을 못 이겨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어머니까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임명희 강사의 노래가 끝나고 “왜 내가 부르면 앵콜이란 말이 없어”라며 농을 건네자 어르신들이 깔깔

대며 ‘앵콜’을 연호했다. 

열정적이며 끼가 넘치는 강사에 서하면의 흥이 많다 못해 넘치는 어르신들이 만나서 어울리니 시너지 효과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흥겨운 노래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보니 컴컴한 밤이 됐지만 오히려 어르신들의 노래는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노래가 어르신들에게 힘을 북돋는지 노랫소리가 더 커져만 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어르신 몇 명이 더 찾아 오셨다. “관광버스 타고 오다가 노래교실이 생각나서 요 앞에 내려달라고 했어”라는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꽃놀이를 다녀오는 길에 노래교실이 생각나서 찾아왔다고 한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시지 않을까 싶었지만 집에 들르지도 않고 이렇게 바로 노래교실로 오시는 걸 보면 어르신에게는 노래교실이 활력충전소인 것 같다.

흥과 끼가 넘치는 서하면 노래교실이 시작 될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렇게 흥이 넘치는 노래교실이 만들어 진 것은 어르신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강사와 끈끈한 유대감으로 똘똘 뭉친 회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노래교실의 시작부터 함께한 오정은 노래교실 회장

오정은회장이 서하면 노래교실에서 회장을 맡은 것도 올 해로 5년째다. 서하면 노래교실이 시작 된지 5년 정도 되었으니 서하면 노래교실의 처음을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노래는 좋아했지만 잘 부르지 못해 남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오회장은 노래교실을 다니면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저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제 노래실력을 칭찬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이게 다 노래교실에 다닌 덕분이죠.”라고 전했다.


 

오회장의 노래교실 사랑은 끝이 없었다. 5년 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무조건 노래교실이 우선이라는 오회장은 임명희 강사가 그렇게나 고맙다고 한다. “필요한 부분을 딱딱 짚어서 설명을 해주니까 노래를 배우는 것도 쉽고 기억에도 오래가고”며 “강사님이 너무 잘 해 주신다.”고 임명희 강사에 대한 아낌없는 믿음을 드러냈다.

또한 함께 노래교실에 다니는 회원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언제나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신 회원들도 너무 고맙다.”며 회원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드러냈다.

5년의 시간동안 노래교실의 회장을 해오며 수많은 추억이 남았지만 그중에서도 오 회장은 처음 대회에 나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기만 했는데 대회에 나가고, 무대에도 서보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며 “평소에 무대에 서는 것이 쉽지 않는데 그런 경험을 해서 너무 좋았다.”고 전했다.   

 

귀농귀촌의 활력소 노래교실의 새내기 김병달 씨

 

김병달씨는 귀농귀촌을 한지 이제 1년이 되어 간다. 그는 현재 에덴동산에서 귀농 귀촌을 위해 사과 농사를 배우고 있다. 그런 그에게 노래교실은 함양군에 사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처음에 아는 동생으로부터 서하면 다목적 센터에서 풍물교실을 한다고 해서 왔었다는 그는 “그런데 노래교실까지 한다는 것을 듣고 둘 다 배우게 됐다.”고 한다.

평소에도 장거리 운전을 할 일이 많아 언제나 노래를 듣고 흥얼거릴 만큼 노래를 좋아하던 김 씨는 노래교실에 나온 덕분에 더욱 노래에 빠져들고 있다. 


 

덧붙여 “다른 사람들이 제 목소리가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라며 자기자랑도 덧붙였지만 직접 노래하시는 걸 들어보니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귀농을 한지 이제 7~8개월 쯤 되었다는 그는 다른 분들도 노래교실에 많이들 오시길 바라며 노래교실에 다닌다고 전했다. “제가 서하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은 분들에게 추천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저 제가 열심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다른 분들도 관심을 가져주시지 않을까 싶어 꾸준히 노래교실을 찾는다.”고 전했다.


부부가 함께해 더욱 즐거운 백홍기·이양순 부부

 

서하면 노래교실에는 특별한 회원 두 명이 있다. 바로 부부가 함께 나오는 백홍기·이양순 부부다. 회원마다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도 함께 나와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지그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은 요즘 말로는 ‘꿀 떨어진다’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이 될 듯 하다. 마치 이제 신혼 초인 신혼부부와 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은 주변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부부가 노래교실을 같이 나오게 된 것은 부인인 이양순씨의 공이 컸다. “처음에는 노래도 잘 못 부르고 아는 노래가 없어서 노래교실이 생길 때부터 저 혼자 다녔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남편도 같이 나가자고 했죠.”. 부인과 함께 노래교실을 나오기까지는 꺼리기도 좀 많이 꺼렸다는 백홍기씨는 “남자가 한 명도 없는데 가기가 그래서 좀 꺼렸는데 나와 보니 너무 좋습니다.”라며 다른 남성분들도 많이 오셔서 가정이 화목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 부부가 함께 해서 더욱 좋다는 이들은 노래 수업의 효율도 두 배 재미도 두 배라고 한다. 이씨는 “노래교실이 끝나고 와서 바로 자는 것보다 오늘 배운 걸 같이 복습하면 더 재밌고, 더 빨리 익히는 것 같아요”라고 한다.


서하면 노래교실을 찾는 수강생들은 농번기라 바쁜 와중에도 노래교실을 찾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노래에 대한 열정은 함양군 어디를 가도 뒤지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수강생들이 노래교실을 통해 얼마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지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강사와 수강생 사이에 5년이라는 시간동안 쌓인 유대감이 이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든다. 강사와 수강생 관계가 아닌 한 가족처럼 어우러져서 부르는 노래는 듣는 이마저 절로 어깨춤을 추게 만들만큼 흥겨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강민구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10 10:37

이장놀이에 푹 빠져 마을을 바꿔 가는 그녀

이장 2년차. 20년에서 30년 이상 이장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햇병아리로 보일 수 있지만 이성미 관변마을 이장의 당찬 모습을 본다면 ‘과연’이라 할 것이다.

함양생활 21년째인 이성미 이장은 지난해 1월1일부터 관변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마을 이장은 마을의 심부름꾼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놀이라고 생각하지요. 이장놀이.” 그녀가 말하는 이장놀이는 어떤 것일까.


 

거창이 고향인 그녀는 결혼과 함께 함양에 들어왔다. 그리고 30대부터 시작한 부녀회장을 8년간이나 맡았다. “이장과 부녀회장은 하는 일이 완전히 달라요. 부녀회장 할 때는 어버이날 어르신들을 위한 마을잔치만 열어주면 되었는데 이장은 너무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이장을 맡았지만 일부 어르신들은 그녀를 이장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여자가 잘 하겠어’라는 은연중의 무시와 농사일이라곤 해보지 않은 그녀가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마을 어르신들과 친해지기 위해 집집마다 들러 인사하고 숟가락 몇 개인지도 조사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 풀을 뽑고 쓰레기를 주웠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이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찾으며 지난 1년간이 훌쩍 지났다.

전체 78가구의 관변마을, 함양읍의 관문에 있는 마을은 어느 곳보다 깨끗하다. 항상 이성미 이장이 쓰레기를 줍고 풀을 매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이장을 맡은 이후 지난 1년간 관변마을은 크고 작은 20여개의 사업을 따 올 수 있었다. 함양읍에서 가장 많이 바뀐 곳이 관변이라고 할 정도다. 그녀가 이장을 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후된 마을회관을 보수하고 마을 정자를 새로 만드는 등 어르신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속속 들어섰다. 그렇게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일을 추진하다 안 되면 읍장부터 시작해 군수, 의장에 국회의원까지 찾아갔다.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그녀의 악바리 같은 성격이 한몫을 했다. “마을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마을이장을 맡았으면 최고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지요” 그렇게 이장 첫해를 정신없이 보냈다. 그 노력의 결과인지 어르신들도 차츰 보는 눈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이장이라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 등으로 불렀는데, 이제는 이장이라고 정식으로 불러줘요.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마을 이장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마을 어르신들을 돌보는 것이다. “자제분이 안 계신 분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시간이 늦어도 들에서 들어오지 않는 어르신들을 모시러 가고. 일을 찾으려면 한도 끝도 없어요” 이제는 어르신들이 어느 정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힘들게 잡초를 뽑고 있으면 시원한 물도 가져다주시고, 상추며 양파며 고생한다며 집 앞에 놔두고 가시는 경우도 있어요. 누가 놔두고 가셨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뻐요.” 어느 누구보다 추진력이 강한 여장부 이성미 이장. “할 일이 천지예요 이장이 찾아서 해달라고 조르지 않으면 행정에서는 알아서 해주는 경우는 없어요.” 새벽부터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어르신들로 인해 놀라기도 했다는 그녀. TV가 안 나온다. 물이 안 빠진다. 택시 불러 달라 등 민원도 각가지다. 이제는 마을 어르신들도 조금은 알아서 일을 한다. 그 만큼 어느 순간부터 마을의 단합까지 이뤘다.

겉으로는 당찬 그녀지만 몸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근육섬유통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몸에서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파온다. 병원에서도 스트레스 받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릴 정도지만 그녀는 이장 일이 즐겁다. “일을 하다보면 힘들고 아픈 것은 다 잊게 되요. 그러고 집에 가면 아프지만” 그녀는 힘들지만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봉사하는 즐거운 놀이로 이장을 맡고 있다.

48명의 함양읍 이장들 중에서 막내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이성미 이장. 그녀는 적십자회 총무, 새마을부녀회협회 부회장, 전의경어머니회, 의용여성소방대원, 민방위대원, 2020함양산삼항노화엑스포 위원 등 여러 사회활동을 펼쳐왔다. “그 동안 겪었던 것들보다 많은 것을 지난 1년 사이에 다 경험한 것 같아요. 힘들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냥 재미있게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스럽게 물러나면 될 것 같아요”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06 14:04

 

의좋은 4형제가 일궈가는 글로벌 기업의 꿈

 

함양의 대표적 향우 기업인인 하종언 대표가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지난 3월15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제44회 상공의 날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상공인 유공자에 대한 훈·포장 중 하종언 (주)하도FNC 대표가 영광스런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번 하종언 대표의 대통령 표창 수상은 끊임없는 투자와 기술개발을 통한 당당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향우 기업인의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병곡면 도천리 우루묵마을 출신인 하종언 대표는 함양의 대표적인 향우 기업인이자 고향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4형제가 함께 우애로 뭉쳐 기업을 일궈낸 신화는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기업 하도FNC

‘물과 길처럼 미래에 대한 도전’. 하종언 대표의 도전 정신과 글로벌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그가 20여 년간 추구해 온 기업가 정신이기도 하다. (주)하도 FNC (河道 FNC, Future & Challenge)는 지난 1994년 창립해 23년간 꾸준하게 자동차 내장재 제조에 힘써왔다. 하 대표의 기업 정신을 바탕으로 자동차 내장재 산업용 섬유를 주요 사업으로 자동차 내장소재 및 부품, 자동차 스크림 부직포 등 자체 기술연구소를 운영해 경량화 친환경 분야에 집중하며 미래지향 소재를 연구 개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IMF 외환위기의 파고도 넘었으며,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늪도 무사히 건너며 등 무수히 많은 위기를 넘겼다. 그 밑바탕에는 내부 체질 개선, 생산성 향상 등 피나는 노력을 산물이기도 하다. 또한 전 직원이 하나 된 마음으로 회사를 사랑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 분위기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융화되어 변하지 않는 꾸준한 하도 FNC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도 FNC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가족 같은 기업문화 조성으로 이직률 0%에 가까운 가족회사다. 회사 게시판을 살펴보면 2017 하도 사자성어 질풍경초(疾風勁草)가 눈길을 끈다. ‘임직원 모두가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굳센 풀이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변화와 혁신은 고되고 힘들지만 현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희망차게 100년 하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하자’라는 직원을 가족같이 모두가 힘을 모아 함께 나아가자라는 의미다.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가족같은 사내 분위기가 바로 하도FNC의 글로벌 기업으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하도 FNC 설립과 성장

하종언 대표는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사업가다. 21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여읜 하 대표는 장남이라기보다는 어린 동생들의 아버지로서 이끌었다. 동생들의 학업을 대학교까지 뒷바라지해 자립시킬 것은 물론 형제들과 함께 글로벌 기업을 일궜다. 특히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로 사업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잡음 없이 무탈하게 꾸준히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주위에 부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참으로 부러운 형제애를 보여주고 있다.

 

하종언 대표이사는 삼성전자에서 5년간 근무했으며, 섬유회사의 무역 업무를 담당하며 능력을 키워나갔다.

섬유회사의 무역 업무를 하면서 일본을 드나들었고, 이를 경험으로 4형제가 의기투합하여 다함께 살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섬유 제조업을 선택하여, 남다른 열정으로 현재의 하도FNC를 창립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도FNC를 성장시킨 주역으로는 그와 함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있다. 총괄대표이사로서 하 대표는 형제간 기업을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현재 자회사인 하림테크(자동차용 부직포 등 생산) 대표를 맡고 있는 둘째 하종찬 대표를 1996년 입사시켰다. 현재 자회사인 세하산업(생활용 부직포 外 생산) 대표를 맡고 있는 셋째 하종문 대표는 94년 입사했다. 넷째인 하종훈 대표 역시 97년 입사해 자회사 하정인터내셔널를 이끌고 있다. 둘째 하종찬 대표는 영어전문 담당, 셋째 하종문 대표는 중국어 담당, 넷째 하종훈 대표는 영어 담당으로 글로벌 기업 형제 기업이 되었다.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주)하도 FNC는 2014년 매출이 420억, 2015년 417억, 2016년 443억 등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7년 600억, 2018년 850억 계열사포함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향우 하종언 대표는

(주)하도 FNC (www.hadofnc.com) 하종언 대표이사는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우루묵 마을 출생으로 병곡초(32회), 함양중(25회)을 졸업하고 일찍이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학업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다.
하종언 대표는 고향의 발전을 위해서도 조용히 봉사하는데 힘쓰고 있다. 재경 함양군 향우회 임원, 재경병곡면향우회장을 역임하는 등 애향심이 투철한 자랑스런 향우이다.
최원석 서울지사장

 

Posted by 주간함양
함양사람들2017.04.06 13:40

50년 함양시장의 산증인 세월의 흔적을 쫓는다


지리산함양시장으로 이름을 바꾼 중앙상설시장.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장을 삶의 터를 삼고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 50년 넘게 지리산함양시장을 지켜온 조용언(77) 중앙철물점 대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철물점을 시작해 현재까지도 꿋꿋하게 시장을 시켜오고 있다. “장사를 시작한지 50년이 넘었어.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5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철물점만큼이나 조용언 대표의 얼굴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이곳 중앙철물점에서 주로 취급하는 물품은 농기구다. 호미, 괭이, 삽, 낫 등 다양한 농기구들이 제 주인을 기다린다. “예전에는 많이 팔렸지만 요즘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예전만큼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안타깝게 하소연 하는 조 대표. 한창때는 이곳에서 탈곡기도 팔고 쟁기와 써래 등 덩치가 큰 농기구들도 취급했었다. “대구에서 삼륜차에 농기구를 싣고 가져왔었지. 삼륜차에 실어 봐야 얼마나 실을 수 있겠어. 그렇게 해서 팔았었지” 아련한 옛 추억처럼 할아버지의 가게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층층이 먼지도 쌓여있다.

 

간만에 온 손님, 합천에서 놀러와 봄나물을 뜯으려고 칼을 산다며 작은 칼을 잡고 가격을 깎아 달라 조른다. “제 값을 주고 사야 제 몫을 하는 거여. 필요한 물건은 깎으려 하면 못 써”라며 혼내신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조금은 깎아 주는 센스를 발휘하는 조 대표. 조금의 에누리는 주는 것이 재래시장의 참맛이다. 곧바로 칼을 팔지 않고 몇 곳에 손을 댄다. “잘못 다루면 다칠 수가 있어. 이렇게 손잡이 쪽 칼날을 조금 깎아 줘야만 다치지 않고 쓸 수가 있지. 이렇게 손질해주는 곳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라며 큰 소리를 치신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이웃한 전북 산내다. 이곳에 터를 잡고 50년간 철물점을 운영했다. “단골도 참 많았는데 내 또래는 대부분 죽었어. 이제 농사도 짓지 않고...” 예전 한창 함양시장이 잘 될 때는 이곳에도 철물점이 4곳이나 있었단다. 5일장이 서지 않는 평일의 함양시장을 찾는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어야 견물생심 보고 물건을 사지. 농부가 농사를 지어야 물건이 팔린 건데 영... 내 집이고 갈데도 없으니 문을 열어놓고 있는 거지”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문 쪽을 바라보는 조용언 대표.

 

 

50년 철물점을 운영한 조용언 대표는 지리산함양시장의 산 증인이다.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지리산함양시장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가집 시장에서 지금의 모습까지 그의 추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때가 재미있었지. 술 먹고 비틀비틀하고, 싸움도 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었어” 요즘은 명절 대목에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평가다. “예전 명절 대목에는 사람들이 많아 밀려다녔어. 생각해봐. 이 좁은 시장 바닥에 가득 사람들이 몰려와 대목장을 보는 모습이 얼마나 좋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어떤 이가 ‘칼 갈아 주죠’라며 식칼 등 4개를 건넨다. “할일이 없으니 이거라도 해서 담뱃값이라도 벌어야지 않겠어” 그렇게 받아든 칼을 그라인더로 갈고 다시 한 번 숫돌로 날을 세운다. “못 가는 칼은 없어.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왜 못 갈겠어” 두 번의 작업이 끝나자 뭉툭했던 칼날이 바짝 날이 섰다. “다른 사람이 보면 칼 갈아 먹고 산다고 흉 볼 수도 있어. 처음에는 칼을 안 갈았는데, 하도 갈아달라고 부탁해서 시작했지. 칼만 갈아서는 먹고 살수가 없어” 두 번의 작업을 거친 칼이 제대로 날이 섰는지 종이를 잘라보며 실험해보기도 한다. 칼 가는 가격이 얼마냐는 물음에 “그냥 대충 2자루 갈면 담배 한 갑 가격이면 돼”라며 넌지시 가격을 알려준다.

 

“그만 두려고 해도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 누가 와서 이런 일을 하겠어. 마음은 안 그런데 이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 올해만 하고 그만해야지. 매년 그렇게 또 하고. 오늘이라도 누가 한다면 다 줄 건데. 고물장사한테 주기는 너무 아깝잖아”
강대용 기자

Posted by 주간함양